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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날의 여인 - 3


2026.05.07 조회수 645,156회


 


나는 한 달여 동안 ‘강변 찻집’을 드나들며 그녀와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드가와 피카소 그리고 김홍도와 천경자를 들먹이며 미술 얘기를 했고 드보르와 슈베르트, 그리고 서태지와 조용필을 들먹이며 음악 얘기를 했는가 하면 박경리, 조정래, 이문열을 들먹이며 문학 얘기를 했다. 



안개 낀 그날 우리들의 얘기는 어떻게 하다 보니 ‘라면집’으로 흘렸다.



“그런데 난, 그 호호라면이란 것을 한 번도 먹어보질 못했어요.” 



“그랬을 거예요. 그 아저씬 혼자인 손님에게는 절대 팔지 않거든요.”



“그 호호라면이 도대체 뭐죠? 훈이 엄마는 먹어봤어요?”



“아뇨. 나도 아직... 근데, 다른 사람이 먹는 건 본 적이 있어요.”



“뭔가요? 값은 오히려 그냥라면보다 싸다는데...”



“별거 아녜요. 남녀 커플이 한 그릇에 담긴 라면을 호호 불면서 먹는 거예요.”

 


그런 대화 끝에 그녀는 멜빵 아저씨에 관하여 얘기해 주었다. 



멜빵 아저씨는 원래 성악을 전공한 오페라 가수였다는데, 그녀는 그가 노래 부르는 것을 한 번도 듣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사진이나 음반 같은 그 흔적조차 본적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멜빵 아저씨는 가곡을 부르는 소프라노 가수와 결혼했다고 했다. 그러나 긴 열애 끝에 막상 결혼해 보니 그 소프라노 가수가 지독한 독신주의자였다는 것이다. 소프라노 가수는 섹스를 밝혔지만 한 침대에서 잠자는 것을 거부하려 했고, 일상생활도 따로 하길 원했다는 것이다.

 


그 소프라노 가수는 결국 멜빵 아저씨에게 별거를 선언하기에 이르렀으며 그 선언은 이혼으로 이어졌다고 했다. 나는 그녀의 얘기를 듣고 멜빵 아저씨가 ‘호호라면’에 집착하는 이유를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멜빵 아저씨에 관한 얘기를 끝낸 그녀는 나에게 라면집에 가자고 했다. ‘호호라면’을 먹게 해주겠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라면집에 갔을 때

멜빵 아저씨는 탁자에 우두커니 앉아 파이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우리는 인사말을 거의 동시에 했다. 그러나 멜빵 아저씨는 우리를 전혀 반기지 않는 표정을 지었다. 멜빵 아저씨는 파이프 담배 연기를 두어 번 내뿜고는 이렇게 말했다.

 


“기어이 붙었군...” 

 


‘붙었군.’ 앞에 ‘흘레’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멜빵 아저씨는 ‘기어이 흘레를 붙었군.’이라고 얘기하고 있었다.


 

“기어이 붙었군...”

 


그 말이 ‘년과 놈이 기어이 흘레붙었군.’이라는 말의 축약된 말이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순간 나는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그녀는 기분 나쁜 표정도, 부끄러운 표정도, 당황해하는 표정도 짓지 않았다. 그녀가 멜빵 아저씨의 그 축약된 말을 풀지 못했는지, 풀긴 했으나 멜빵 아저씨의 말투가 원래 그래서 그러려니 했는지 아무튼 그녀의 표정은 무덤덤했다.



그날 그녀와 나는 처음으로 ‘호호라면’을 정말 호호 불어가며 먹었다. 그리고 멜빵 아저씨는 그 이상 해괴한 말을 하지 않았다.


 

그날 밤이었다. 나는 서울의 그녀에게 전화를 받았다.

 


“어때? 부산생활이...”



“그냥 그렇죠. 뭐....”



“과부 아줌마랑은 많이 엉켰어? 그 버릇이 부산이라고 가시진 않았을 테고...”



“과부 아줌마라니, 표현을 그렇게밖에 못해요? 누나가 천박해 보이잖아요.”

 


나는 그녀의 ‘과부 아줌마’라는 표현에 강변의 그녀가 떠올라 잠시 당황했고, 그 당황함을 메우느라 그렇게 대꾸하게 되었다.

 


“나, 원래 천박하잖아. 그럼, 과부 아줌마를 어떻게 표현해야 해?” 



“미망인이나 이혼녀... 뭐, 그런 표현 있잖아요...”



“그래 좋아... 미망인이랑 이혼녀랑 많이 엉켰어?”

 


‘엉켰어’라는 표현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꼭 강변 그녀와 섹스했느냐고 묻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무렵, 나는 ‘그녀’와 ‘섹스’는 전혀 별개의 개체라고 생각했다. 가을 내음이 물씬 풍기는 그녀에게 색정의 이미지가 스며들 틈이 없었던 것이다. 그녀와 섹스 이미지를 접목해 보는 것 자체가 그녀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했다.

 


“엉켰어가 뭐예요. 다른 표현도...” 



“오늘은 웬 표현 타령이야?”



“가을이잖아요... 가을밤에 쓰는 표현치곤...”



“알았어... 가을밤에 어울리는 표현을 해 주지...”

 


서울의 그녀 말투에 비아냥거림이 섞였습니다. 평소 그런 음탕한 말투를 좋아했던 내가 새삼스럽다는 투였다.

 


“그래야죠... 어디 해 보세요...” 



“씹! 미망인과 씹 많이 했어? 어때? 가을밤에 어울리는 표현이지?”



“누난 못 말려... 근데, 이 밤에 웬 전화예요?”



“너, 이젠 부산 과부랑은 씹 못 하게 되었어.”



“왜요?”



“회사에서 복귀명령이 났어. 다음 주 월요일부터 서울 사무실로 출근해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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